왜 믿는가. 유익이 있으니 믿는다. 그 유익이 뭔가. 영생이라는 장래의 일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뜻은 나만 아니라 나 통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게 하심이다. 남을 위하는 일까 지도다. ‘자신만을 위한’ 믿음이 기독교계에 깊이 스며들어있는 현실과는 반대다.
기복신앙이 왜 안 좋은가. 자기 위한 것이라서다. 내 소원 이뤄달라고, 필요한 것 구하려, 어려울 때 도움이 필요해서, 그런 때만 필요한 하나님인가. 그게 믿음인가. ‘나’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 중심으로 나만을 위하며 내가 잘되기를 위해 믿는 것이라면 우상 앞에서 절하는 것과 다를 게 뭔가.
교회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이 갈수록 더해가는 것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일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교회다운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점차 빈번해진다. 신앙인으로서의 당당함이 잠식당하고 있는 느낌마저 있다.
머리이신 예수님이 드러나셔야 할 교회에서 사람이 드러나는 게 문제다.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셔야 할 결정을 하인들이 하려니 뜻이 갈린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닌 성도의 모임인데도 사람이 소유주인 이익 집단이 돼가는 느낌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성도들이 모인 곳인데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예배가 사람의 감각을 만족시켜줘야 하는 ‘행사’가 돼간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귀족이나 특권 계층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꾼이며 섬기는 위치다. 그런데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가짐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사랑’의 의미가 조건 없는 희생적임을 잘 알면서도 실제 삶에선 그 사랑을 주고받는 ‘정’처럼 여기다 보니 포근하고 위로 넘치는 공동체이기보다 한 몸 안에서 서로 미워하고 등 돌리는 일이 생겨나고 서로 마음을 찢는 일까지도 보게 된다.
‘배은망덕’이란 말은 꽤 악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린 혹 하나님께 배은망덕해지고 있진 않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일…, 어떻게 주신 구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통해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린 그 은혜 드러내기를 자신 위함보다 더 힘쓰고 있는가.
사람은 본성이 이기적이다. 그래서 믿음마저도 이기적인 것이 되기 쉽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희생하신 그 사랑을 힘입어 우리도 그 이기성을 이길 수 있다. 사랑의 힘이다. 사랑이 식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기 원하시는 믿음은 결국 ‘남을 위하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다.
나는 제대로 믿고 있는가. 내게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믿음인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말씀 따라 어두운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추는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이웃과 세상을 돌아보고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어떻게 해야 세상에 하나님의 빛 비추는 삶이 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믿는 자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