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돕게 만들어진 인간

“미안합니다” 라든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하기는 꽤 어렵다. 자존심 때문이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시인하기 싫기 때문이다. 흠 없고 온전하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 본성이다. 그래서 실제 잘못을 했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에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도움 요청 자체를 자신의 부족함 내보이는 것으로 여겨서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도 청하기를 꺼리거나 안 하고 만다. 도움받는 일을 수치로 여기기까지도 한다. 도움 없이 해내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도움이 없어서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사람은 불완전하다. 창조주께서 그렇게 지으셨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완전함 향해 자라가게 하시려는 뜻이지만 ‘서로 돕는 삶’ 살게 하시려는 뜻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나님 사랑을 이 땅에서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마음가짐이 먼저다. 그와 더불어 이웃의 도움을 꺼림 없이 진정한 감사의 마음으로 받는 자세도 필요하다.

도움받기를 싫어한다고 남을 돕지 않는 건 아니다. 남을 돕는다는 게 뒤집어 생각하면 자신의 상대적인 강함을 보일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도움받기는 거부하면서도 남 돕는 일엔 적극적인 사람들 의외로 많다. 일종의 ‘자기의’다. 반대로 남에게 도움받기는 잘하면서도 남 돕는 일엔 인색한 사람들도 있다. 사람을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동기는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 볼 수 있다.

“내 모습 이대로”라는 말에서 위로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마음속으로 연약함을 의식한다는 것과 그런데도 삶 속에서 약하지 않게 보이려 애쓰기 때문이다. 약한데도 강한 듯 치장하는 건 이미 공인된 일이 돼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치장을 잘해도 부족과 연약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신앙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모습이다. 뭐가 달라야 하는 건가. 강한 모습이 아닌 진실한 모습이다.

도움받을 줄 아는 사람이 도울 줄도 안다. 자기 연약을 감추지 않는 마음으로는 남의 연약이 흉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와야 하는 사명으로 보게 된다. 자기만족을 위해 돕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연약함을 돕기 원하는 마음으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실…, 편하게(?) 얻은 구원이라서 별 감동도 감사도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지고도 세상 자녀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게 혹 현대 크리스천의 모습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크나큰 도우심이다. 그 은혜의 자리에 가만 머물러 있을 순 없다.

우린 서로 돕도록 지어졌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물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도 결국은 서로를 돕는 일이다. 풀포기에 불과한 존재를 자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그 도우심을 마음 다해 전하는 자가 진정한 신앙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