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다’는 ‘귀하지 않다’를 줄인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실제 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쓰이기보다 귀한 것을 의도적으로 부인할 때 자주 쓰인다. 꼭 해야 할 일, 생각해야 할 문제인데 귀찮다는 이유로 외면한다. 바로잡아야 할 관계, 고쳐야 할 습관인데 귀찮다고 내버려 둔다. 귀함은 알지만 자기 몸과 맘을 더 아끼기
때문이다. 그것이 게으름의 본질이다.
귀찮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실은 귀한 것이다. 분별을 바로 해야 한다. 귀하고 있지 않고는 자신의 판단에 달린 것이지만 그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치판단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하나님의 소중한 뜻이 담겨있다. 즉 자기 눈에 귀히 보이는 대로 행하라 하시는 거다. 그렇게 할 때야 자신의 존재 이유가 드러난다. 판단의 옳고 그름보다 그 판단을 실행함이 더 중요하다.
자신을 아끼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치면 게으름이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을 향한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게 된다. 이 땅에서의 주어진 시간과 환경 안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제대로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게으른 본성, 즉 안락 하려는 욕구를 다스리는 일이 먼저다.
현대 문명은 ‘편리함’에 가치를 둔다. 그러다 보니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도 나쁜 일로 여기지 않게 된다. 하지만 안락 추구가 게으름으로 자라고 게으름이 새로운 변화에 대한 거부로 자라간다. 그로 인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모습이 갈수록 굳어져 간다. 일하도록 만들어진 몸을 쓰지 않으니 온갖 이상한 병이 생긴다. 고된 일엔 사람이 부족하고 편한 일엔 경쟁이 치열하다. 안락함이라는 거짓 가치가 게으름을 부추기고 있는 현실이다.
게으름은 잘 깨닫지 못한다. 알아도 별문제 삼지 않는다. 특히 신앙인들의 게으른 정도가 점차 심해지는 느낌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께 충성함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면서도 몸과 맘의 욕구가 우선한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기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기보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한다. 하나님이 ‘귀찮아’지는 건 아닌지. 마지막 때 “사랑이 식으리라”는 성경 말씀대로 이웃하기 위한 마음도 귀찮아진다. 예수님은 게으름을 ‘악’이라 말씀하셨다. 인류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주범이 게으름이라는 뜻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의 어떤 일과도 견줄 수 없는 대혁신이다. 그보다 더 위대한 일, 더 큰 희생이 없다. 결코 이겨낼 수 없었던 인간의 연약함을 그 돌아가심을 힘입어 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연약함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게으름’…, 그 고질병을 치유할 길이 이젠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성장은 변화다. 자라기를 원해도 변화를 거부하면 자랄 수 없다. 게으른 바탕으로는 새로워질 길이 없다. 예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려 날마다 친히 함께하시며 이끌어 주심을 믿는다면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신앙인이라면 ‘귀찮다’는 말이나 생각은 버려야 한다. ‘게으름’이란 잠에서 깨어나자. 모든 일과 관계에서 열심과 정성을 내자. 그것이 예수님의 돌아가심을 믿음의 삶에 적용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