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너그럽다거나 잘 품어준다는 것은 그 말만으로도 포근함과 위로를 느낀다. 누구나 좋아하고 반길 마음이다. 포용력, 여유, 온유함도 그 선한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융통성’은 뭔가 다른 부류다. 늘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융통성과 대조되는 게 원칙이다. 둘 다 중요하다. 그런데 그 둘을 실제 삶에서 어떻게 조화시키는가의 문제가 늘 등장한다. 원칙과 융통성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둘 건지는 상황이나 경우, 대상이나 일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한 기준은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갈수록 싸움이 심해지는 근본 원인은 이기심이다. 자신을 위하려는 바탕으로는 원칙이든 융통성이든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남을 위하고자 하는 동기, 진정으로 이웃을 생각해주는 마음 바탕이어야 그 두 가지가 선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비난을 위한 원칙이나 눈감아주기 위한 융통성은 선한 것이 될 수 없다. 부모가 자녀에게 매를 드는 것은 원칙이나 융통성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 원칙을 강조하면 고지식하다거나 고집스럽다는 말을 듣지만 고지식하나 고집은 원칙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있어야 할 융통성이 없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남이 자신에게 융통성 적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 자신도 남에게 그렇게 적용해주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의 백성답기 위한 원칙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 원칙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죄인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은혜를 융통성처럼 여기는 예가 우리 주위에 흔하지 않은가. 죄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은 변함없는 원칙이다. 그래서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흔드는 일에도 결코 인간의 융통성이라는 구실을 적용할 수 없다.
원칙을 행할 주체는 우리이고 융통성을 행하실 주체는 하나님이시라고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어디까지나 원칙 위에 서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다. 하지만 그 원칙을 벗어난 부분에 은혜라는 융통성을 적용해주시는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주신 원칙과 인간 현실의 괴리를 친히 채워주시려 예수께서 인간이 되셔서 돌아가신 것이다. 신앙인들이라면 그래서 예수를 힘입어 자신을 하나님 주신 원칙에 맞춰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순결’이 원칙인가 융통성인가. 정직함, 윤리의식, 공경심, 세상과 구별됨 등은 어느 쪽인가. 성경에 융통성에 해당하는 말씀은 있나. 도리어 “온존하라” 명하신다. 물론 온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원칙이다.
융통성이란 핑계가 활개 치는 세대… 허용될 수 없는 일에 사람 뜻대로 융통성을 적용하기 때문에 세상이 오염되고 어두워져 가는 것이다. 혹 융통성을 이기적으로, 정욕을 위해 적용하고 있진 않나. 원칙을 남 이기려는 생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신뢰함이다. 하지만 원칙 위에 굳건히 서 있을 때에야 은혜가 진정한 은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