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지 않은데 다들 하니까 마지못해서 하거나 다들 맛있다고 해서 먹기 싫은데도 억지로 먹은 경험이 있을 거다. 대다수의 의견이 나와 다를 때 수적으로 열세라는 이유로 내 의견을 포기한 적은 없는가.
믿음 없던 직장 생활 시절, 술 못 마시는데 상사의 명령과 직원들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갈 때 느꼈던 작은 분노를 기억한다. ‘다수의 횡포’란 말이 생긴 까닭은 다수가 실제 악해서가 아니라 상대적 소수가 감수해야 하는 손해와 불이익 때문이다. 눈에 잘 안 띄는 작은 것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소수일수록 소외되고 마음 상하기 쉽고 원망이 쌓인다. 심한 경우 수가 많은 쪽이 정상이고 소수인 까닭만으로 비정상이라 취급받기도 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는 병자와 죄인, 보잘것없는 소외된 자들을 가까이하셨다. 작은 것을 귀히 여기셨다. 작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든지 수가 적어 무시할 만하다는 건 하나님께는 없는 일이다. 큰 선을 위해 작은 것이 희생되거나 단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무시되거나 복리를 앞세워 생명이 경시될 수는 없다.
성경 어디에도 적자생존이나 자연도태라는 건 없다. 특히 목회 사역에서 ‘영혼 하나’의 소중함을 인식 하지 않고는 바른 목회가 될 수 없다. 믿음 가지기 전 주로 다수의 편에 섰었던 합리적인 사람이, 목회자가 되고 나서 종종 뜻하지 않은 문제를 만나고 열심 낸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후에 깨달은 사실은, 작은 것, 소수, 눈에 안 띄는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마음을 덜 쓴 때문이었다. 다수 쪽으로 향하려는 그 맘 바꾸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기뻐하셨던 일임을 확신한다.
큰 데에만 눈이 머무르고 있으면 큰 것만 소망하게 된다. 작은 사람이나 작은 선이 보이지 않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기도 어렵다. 종종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을 놓치기도 쉽다. 드러나지 않는 일, 보잘것없는 것, 작은 은혜라고 무시하게 된다. 수의 많고 적음이나 크고 작음, 사람의 논리나 판단이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다수결 원칙은 무난한 의사 결정법이지만 사물의 가치를 결정할 방법으로 사용될 순 없다. 가치는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달린 것이고 하나님은 ‘생명’에 가치를 두신다.
잃은 양 한 마리는 한 생명이다.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것도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과부의 진심이 담긴 동전 두 개가 그래서 하나님께는 큰 가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치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한다. 세상 기준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 기준의 ‘하나’다. 작은 것에 눈과 마음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작아져야 한다. 눈높이 맞추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작아질수록 작은 것과 작은 사람들이 잘 보인다. 작아진 모습으로 작은 것을 볼 수 있어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감사의 계절이 가까워져 오는데 우리 눈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잘 돌아볼 일이다. 크고 많고 강하고 화려한 데에만 눈이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자세를 바꾸자. 자칫 무시했거나 지나쳐버렸을 작은 것들에 눈을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