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으로부터의 자유

정도가 다른 것이지,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거다. ‘체면 문화’라는 말까지 있는 사실로 보아 실제 우리 삶에서 체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선 체면의 중요성이 공식화(?)돼있는 느낌마저 든다. 심지어는 체면 때문에 목숨을 내놓기까지 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와 직결될 뿐 아니라 그 자체를 삶의 의미로 여기기 때문이다.

“얼굴에 먹칠한다” 할 때의 얼굴이 체면이고 명예 훼손의 명예도 체면이다. 자존심도 체면이다. 결국 체면이란 ‘남들이 인정해주기를 원하는 내 존재’라 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가꾸어가고 만들어가는 자기 모습이다. 하지만 체면의 본질상 자신의 있는 대로의 모습이기보다 남 보이기 위해 꾸미고 덧입힌 모습이 된다.

체면에 매인다는 것은 실제가 아닌 껍데기에 가치를 두면서 위조된 억지 모습을 지키려 애쓰는 것을 말한다. 주님께 돌아오기 전엔 누구 못잖게 체면을 중시했던 사람이었으니 그 체면을 나 자신처럼 여기고 거기 매여서 얼마나 부자유하고 불편한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외형을 고수하려 안간힘을 쓰면서 노예의 삶을 살면서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었다.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를 체험하면서 체면이라는 오래 묵은 자신의 사슬을 벗어버리게 된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삶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신뢰다. 그 신뢰는 만들어진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실제 모습으로서만이 가능하다. 체면 차리기에 맘 쓰다가는 신뢰는 물론 관계도 잃고 만다. 꾸밈과 장식, 외모와 돋보임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한 세대다.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모습 추구하는 것이 대유행이다 보니 어디에나 거짓 모습이 만연하다.

신앙인들이 믿음 안에서 서로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한 대전제는 진실함이다. 이 진실함을 가로막는 무거운 장애물 중 하나가 체면이다. 체면이 우선하다 보니 마음보다 몸이 우선하고, 속과 겉이 다르게 되고, 하나님 사랑이 사람 자랑으로 변해간다. 무엇보다도 이웃을 사랑함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걸림돌이다. 믿음의 삶은 예수님 닮아가는 삶,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다. 자기 부인이고 희생적인 섬김이다.

우리가 혹 교회 안에서 체면 차리는 일, 자신 드러내는 일에 맘 쓰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의 돌아가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지극히 소중한 자유를 체면이라는 속박에 던져버릴 순 없다. 주님 안에서의 형제자매들이 세상 방식의 체면 차리는 것은 사랑 대신 담쌓는 일이 된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일, 그 지위와 영광 다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던 일을 돌아본다. 피조물인 인간 앞에 낮아지신 만물의 주, 그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참모습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는다. 내 체면 버리고 예수님을 나의 체면으로 삼으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 아닌가.